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셸 드 몽테뉴 (문단 편집) === 여행과 보르도 시장 === 『에세』를 발간하고 난 후, 47세의 몽테뉴는 비로소 자발적인 은둔생활을 벗어나 여행을 결심한다.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삶, 욕망, 관습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느낌으로써, 살아가는 데 본받을만한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테뉴는 로마를 목적지로 삼았지만, 매번 샛길로 빠지면서 새로운 고장에서의 고유한 풍습과 음식 등을 즐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해서도 프랑스 사람들이 본국에서 하던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현지 관습에 따라 행동하고, 어디서나 그 나라 방식대로 접대받았다. 로마에서 교황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몽테뉴는 신장결석을 치료하기 위해 이탈리아 온천을 찾았다. 신장결석은 그의 아버지도 말년까지 고생했던 병으로, 가문에 유전되는 병이었다. 그는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수많은 의료책을 읽으면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그 해답이 온천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온천은 말그대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보르도 시장으로 임명됐다. 프랑스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한 상황이라서, 몽테뉴는 굳이 그 직책을 맡고 싶진 않았지만 [[앙리 3세]]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임무를 4년간 수행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나는 1585년, 도시에 [[페스트]]가 덮쳤다. 몽테뉴도 살기 위해 몽테뉴 성을 버리고 가솔들과 여섯 달 동안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울한 피난길이었다. 그 사이에 보르도 시에서는 주민의 절반인 1만 7천 명이 죽었고 그의 임기는 끝났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앙리 3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차기 왕위는 사위인 [[앙리 4세|앙리 드 나바르]]가 계승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앙리 3세는 가톨릭이었고, 앙리 드 나바르는 개신교였다는 점이었다.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을 중재하는 역할을 바로 몽테뉴가 맡았다. 힘든 임무였지만 그는 타고난 솔직함으로 둘 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내전의 승리자는 앙리 드 나바르였고 그는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다. 앙리 4세는 몽테뉴에게 높은 관직을 내렸지만 몽테뉴는 정중하게 사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